山水間我亦절로

ⓞ 草木香.水風響따라 千年佛心길 걷다<160415- 26> : 太古叢林 曹溪山仙巖寺태고총림 조계산선암사 <ⅰ>

십년지기 2016. 5. 27. 03:18

    ★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들에 둘려싸인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자기 生命에의 畏敬처럼   모든 생명의지들에게   동등한 생명에의 외경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체험하는데  倫理가 있는 것이다.
       윤리란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히 확대된  책임이다 ~
    - 슈바이처

    ★ 우주 온 세상의 모든 물질의 총량은 한정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함에  이제부터라도  내 삶에 필요한 만큼만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련다.  그 이상을
    사용하거나 소유한다는 것은 貪慾이리라 ~
       탐욕이란 곧 다른 生命體생명체의 필요량을 착취한다는 것임을 비로서 깨닫는다...
    이제부터라도 바로 少慾知足하는 삶이리라 ~   소욕지족.. 소욕지족하리라 ~ 
    - 이름없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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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산 도립공원 안내도 ~
















       4월 중순 조계산 新綠 ~
















       磨崖如來立像마애여래입상(5m) ~
















































































































       仙巖寺선암사 伽藍가람 배치도 ① ~

















       仙巖寺선암사 伽藍가람 배치도 ② ~











     ※ 仙巖寺 踏査旅行 길잡이

송광사(사적 제 506호)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사적 제 507호)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太古宗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갓 부화한 물고기의 여린 몸뚱이처럼 야들야들한 신록으로 조계산이 물들기 시작하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절 곳곳에는 벚꽃이며 목련·모란·앵두·모과·철쭉·영산홍·동백·상사화·옥잠화·치자·파초·부용 등 갖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잇달아 피어난다. 화훼전시장인 양 그 빛깔과 모습들이 다채로운데, 고풍이 흐르는 전각들과 어울린 분위기는 화려하기보단 새악시 볼에 번지는 분홍색 부끄럼처럼 조신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였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太古宗 :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으로 대처승이 급증하자 1954년 이승만 정부는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는 이른바 불교 정화 유시를 내린다.
비구와 대처간의 다툼이 격심해지자 정부는 1962년에 비구와 대처를 통합한다는 형식으로 조계종단을 새롭게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전통 사찰에서 대처승들이 밀려나게 되자 이들이 반발하면서 우리 불교계는 비구승의 曹溪宗조계종과 대처승의 太古宗태고종으로 나뉘게 된다.
1970년 태고종은 태고 보우국사(1301~1382)를 종조로 하여 태고종으로 등록하고, 선암사를 태고종의 총림(叢林)으로 발족시켰다.

※ 仙巖寺 - 김극기
寂寂洞中寺 적막한 산골 속 절이요
肅肅林下僧 쓸쓸한 숲 아래 중일세
情塵渾擺落 마음속 티끌은 다 씻어 떨어뜨렸고
智水正澄凝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
殷禮八千聖 팔천성인에게 예배하고
淡交三要朋 담담한 사귐은 삼요의 벗일세
我來消熱惱 내 와서 뜨거운 번뇌 식히니
如對玉壺水 마치 옥병 속 얼음 대하듯 하네]

▲ 1920년대의 선암사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피해를 보고 소실되는 등 상처를 겪었지만 선암사는 아직도 한 세기 전의 옛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절이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3)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 동만이 남아 있다.


선암사로 가는 길은 조계산 전체에 고루 드리운 짙은 나무그늘로 인해 늘 상쾌하다. 마음속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다채로울 뿐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더욱 좋다.

절 앞의 여관촌에서부터 이 기분 좋은 숲길을 따라 약 15분 가량 오르면 오른편 길섶으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한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그중에는 사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이형부도 한 기도 있다. 이 부도는 부도밭에 함께 있는 벽파대선사비(높이 3.75m)와 같은 시기인 1928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대사 부도(높이 4.1m)로,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전남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8호, 8세기 중엽 작품)이나 충북 제천 빈신사터사사자석탑(보물 제94호, 1022년 작품)을 닮았다.

▲ 입구의 부도밭
 길 옆에 자리한 부도밭으로 11기의 부도와 8기의 비가 줄지어 서 있는데 그중 화산대사 부도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부도밭을 지나 계속 가면 길가에 장승 한 쌍이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남녀상이 아니라 모두 남자상이다.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갑진년(1904) 선암사 나무장승 이후 정묘년(1987)에 새롭게 세워진 나무장승이다. 갑진년 나무장승은 1907년 이래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 나무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사찰 수호업무에서 퇴직하여 경내의 설선당으로 옮겨져 보호받고 있다.

▲ 선암사 장승
 선암사 입구에는 그동안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고 70여 년의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장승이 있었는데 현재는 경내 설선당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그 장승들을 본따 1987년 새롭게 세웠다. 그중 방생정계 장승이다.


정묘년 장승 역시 밤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으로 갑진년 나무장승을 모방했다. 몸통은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호법선신(護法善神)·방생정계(放生淨界)4)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방생정계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호법선신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꼬았다. 눈꼬리를 치켜뜬 채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각솜씨나 들인 공은 갑진년 나무장승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정묘년 나무장승은 갑진년 장승에 견주어 세인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본래 나무장승은 세월이 지나면 교체되게 마련인데도, 갑진년 나무장승의 명성이 너무 높아 정묘년 나무장승이 모조품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가련한 정묘년 장승을 지나 계속 큰길로 걸어올라가면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모퉁이길을 따라 돌면 반원형의 큰 무지개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길은 강선루(降仙樓)로 향한다. 두 무지개다리 중 큰 무지개다리가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昇仙橋)이다.

▲ 승선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다는 평을 듣는 다리이다.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그 안에 강선루가 자리하고 있다.


두 무지개다리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축조방법이나 겉모습에는 차이가 없다. 큰 무지개다리는 길이 14m 높이 7m 너비 3.5m로, 길게 다듬은 30여 개의 장대석을 연결하여 홍예석을 드리우고 홍예석 양쪽에 잡석을 쌓아 계곡 양쪽 기슭의 흙길에 연결시켰으며, 위쪽에는 흙을 덮어 길을 만들었다. 기단부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홍수에 쓸릴 염려가 없도록 하였으며, 홍예석 중간에는 이무기돌을 돌출시켜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재해를 막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했으며, 순조 25년(1825) 해붕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영조 5년(1729)에 놓은 보성 벌교의 홍예(보물 제304호)도 선암사 스님들의 솜씨라고 전해온다.

▲ 작은 무지개다리
 승선교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하나 승선교 못지 않게 자연스럽고 튼실한 다리이다. 이 다리로 들어서야 비로소 승선교의 둥근 원을 볼 수 있다.


작은 무지개다리에서 큰 무지개다리로 이어져 강선루에 이르는 길은 강선루로 직접 통하는 큰길이 생기기 전 선암사에 이르던 옛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강선루가 이 원 안에 들어앉은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그러고 보면 선암사는 선녀와 단단한 줄이 닿아 있는 게 틀림없는 듯하다. 이름에서부터 선녀가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선경이 떠올려지고, 그 이미지가 풍경으로 되살아난 듯하여 신비롭다.

강선루는 누하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팔작지붕집이다.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굽어흐르는 계곡물 사이로 두 다리가 크고 작게 잇달아 있어 더 운치 있다. 강선루에 올라 둘러보는 경치가 더 멋지지만 오르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강선루에서 한 모롱이를 돌면 오른쪽 길섶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길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의 삼인당(三印塘)이다. 연못의 독특한 모습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에 심오한 불교사상5)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증명하기는 어렵고, 고려 의종 원년(1147) 낙성한 「대각국사중창건도기」(大覺國師重創建圖記)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후에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에 새롭게 단장되었다.

▲ 삼인당
 길다란 타원형 못 가운데 알 모양의 둥근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내 못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일주문 못미처 왼쪽으로 작은 폭포를 이루며 경내 밖으로 나와 인공수로를 타고 이곳 삼인당으로 흘러든다.


이밖에 선암사 경내의 연못으로는 설선당 서쪽의 쌍지(雙池)와,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 축대 아래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방지(方池)가 있다. 쌍지는 중앙에 통로가 있어 건너다닐 수 있으며, 방지 옆에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200년 된 적송 한 그루가 있다. 일주문 못미처 왼편으로는 방지와 쌍지에 고여 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은 인공수로를 따라 삼인당으로 흘러든다.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롱이에는 짙은 녹음과 어울린 야생 차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중간 어느 부도비의 잔재인 듯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측백나무, 전나무와 같은 키큰 나무들 아래 나직하게 자리잡은 이 차밭말고도 경내 뒤편에는 더 큰 차밭이 있는데, 선암사의 차는 다인들 사이에서 맛과 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승선교에서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 부분이 선암사의 얼굴로 손꼽히지만,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여러 개의 단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전각 20여 동을 밀도 있게 나누어 배치한 공간구성 또한 허툴지 않은 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 한다.

선암사의 밀도 있는 가람 배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주축 외에 여러 개의 축을 두어 각 영역군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주축을 이루는 대웅전 영역 뒤쪽으로 원통전 영역, 응진각 영역, 각황전 영역이 있으며, 이들 영역을 이루는 여러 전각들은 조금씩 비껴나 있으면서도 이가 물린 듯 줄짓고 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마련되어 갖가지 꽃나무가 사시사철 피고 지며 경내를 치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각들 대부분이 전면 증축되거나 개축되지 않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손보아지며 가꾸어진 덕택6)에 선암사에서는 남다른 격조와 고풍스러움이 풍겨난다.

▲ 선암사 배치평면도


굽이굽이 산모퉁이를 돌며 부도밭·나무장승·승선교·강선루·삼인당·차밭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던 약 1㎞의 숲길을 지나면 일주문에 닿는다. 일주문은 측면에서 보이는 기둥이 하나라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선암사의 일주문은 순박한 표정의 용조각이 장식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기둥 두 개가 화려한 공포를 인 모습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일주문의 배흘림기둥은 곧바로 낮고 작은 담으로 이어져 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 기록에서는 산 이름을 청량산,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선암사가 예전에는 크고 작은 화재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풍수지리학 상으로 볼 때 이 위치가 산강수약山强水弱인 곳이라 산 이름을 청량산이라 하였고 절집 이름은 해천사海川寺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선암사 일주문
 일주문 기둥 옆으로는 낮고 짧은 담장이 이어져 있는데 꽃나무 등으로 가려져 있어 마치 긴 담장 같은 착각이 든다.


일주문에서 계단을 오르면 곧장 범종루로 이어진다.



일주문과 종루 사이의 공간이 좁기 때문일까? 흔히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배치되는 천왕문·금강문·인왕문 등이 없다.(★ 선암사 3無 : 사천왕문, 대웅전 주련과 어간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인 범종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六朝古寺’(육조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집인 누(樓)가 길게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 없이 나무기둥 사이에 흰 벽을 두었는데, 퍽 단아해 보인다. 이곳은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이다.



육조고사라는 현판을 이곳 선암사에 붙인 것은 중국의 선승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서인데, 육조(六祖)를 뜻하는 한자가 육조(六朝)로 달리 표현된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6)이 썼다고 전해진다.

▲ 만세루와 설선당 사이에서 바라본 경내
 경사지에 자리한 선암사는 여러 개의 단과 낮은 축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세루와 설선당 사이의 계단에서 보면 각각의 단에 배치된 전각들이 조금씩 맞물려 보이면서 깊은 공간감이 유도된다.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들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만세루와 함께 안마당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관상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두 기의 삼층석탑은 높이 4.7m이며 보물 제395호이다.

우선 서삼층석탑을 살펴보면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날렵해뵈는 기단부가 올라서 있다. 기단부를 이루는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매씩인데 몸돌에는 우주가 모각돼 있고,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4단이며 지붕돌 위에는 독특하게도 호형(弧形)과 각형(角形) 두 단으로 이루어진 몸돌받침이 있다. 대부분의 신라 석탑은 이 부분이 각형으로, 한 단 또는 두 단이다. 지붕돌은 반전이 심하여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며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듯 구멍이 한 모서리에 8개씩 뚫려 있다. 좀더 살펴보면 초층 몸돌은 윗면이 아랫면보다 2㎝ 정도 좁다. 3층 몸돌 역시 윗면이 0.5㎝ 좁다. 이는 탑이 높아 보이게 하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상륜부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두 석탑은 외관상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다. 지붕돌 위에는 호형과 각형 두 단으로 이루어진 몸돌 받침이 있는데 이는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사진 앞쪽의 탑이 서탑이다.


동삼층석탑은 외관상 서탑과 거의 동일하나 일부 부재가 본래의 것이 아니다. 1986년 해체 복원 때 초층 몸돌에서 사리장신구가 발견된 바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또다른 문화재는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

단아하면서도 정중함이 절로 우러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순조 25년(1825)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막돌을 1m 정도 자연스럽게 쌓아올렸으며,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빗꽃살로 장식하였으나 마모가 심하며, 빛바랜 단청으로 고색이 넘친다. 그런 외부 표정과 달리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7)으로 장엄하게 단장되었으며, 단청도 비교적 선명하다.

▲ 선암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집으로 단아하면서 장중함이 절로 우러나는 건물이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탱화는 비단에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12명의 신장상을 그린 것이다. 가로 3.65m 세로 6.5m 되는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영조 41년(1765)에 제작되었다.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석가본존불을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배치하고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놓았다. 게다가 이 협시상들은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화면 전체에 걸쳐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선암사가 소장한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불화라 할 정도로 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탱화가 곳곳에 많다. 대웅전을 비롯해 각 전각과 암자에 보관된 불화를 모두 합치면 100여 점이 된다고 한다.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왼쪽에 자리잡은 설선당은 외부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층인 ㅁ자형의 건물이다. 1층은 스님들의 거처와 공양하는 곳이며, 위층은 수납 공간이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설선당과 마주한 심검당 역시 중앙에 조그만 마당을 둔 ㅁ자형 건물로, 설선당과 유사하다. 환기창에 수(水), 해(海)처럼 물과 관련된 글자가 장식처럼 투각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선암사의 지세가 산강수약하여 전각들이 빈번하게 불타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이와 같은 처방을 한 것이라고 한다.

▲ 신검당 환기창
 선암사의 지세가 산강수약하여 전각들이 번번하게 불타자 이를 예방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환기창에 물과 관련된 글자를 투각하여 장식하였다.


선암사가 화재 예방에 신경을 곤두세운 흔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때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을 물과 관련된 청량산과 해천사로 바꾸기도 하였다. 대각암 가는 길목에 있는 해천당도 그런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똑같은 이유로 선암사에는 원래 석등이 없었다고 한다. 근래 경내 곳곳에 큼직한 석등들이 조성되었는데 절의 내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유행 타기가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대웅전 오른편에서 대웅전을 향해 서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촐한 맞배지붕집은 지장전이다. 명부의 10대왕이 모셔졌으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조각상들이다.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을 등지고 있는 건물은 응향각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선방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가정집같이 낯익다.

대웅전 영역을 벗어나 대웅전보다 한 단 높여 쌓은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불조전·팔상전·원통전·장경각이 배치된 원통전 영역에 들어선다. 불조전과 팔상전이 나란히 앞쪽에 자리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로 독특한 형태의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원통전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丁자형 건물로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 놓은 것 같다.


불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과거 7불과 미래 1,000불의 불조인 53불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이들은 모두 7점의 탱화에 나뉘어 그려졌는데 숙종 28년(1702)에 제작되었다. 지금은 그중 5점만이 남아 있다.

불조전과 나란히 서 있는 팔상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다. 정면 후벽에 화엄경변상도가 걸려 있는데, 이는 정조 4년(1780) 가로 2.47m 세로 2.68m 되는 종이에 「화엄경」 설법 모습을 그린 복잡한 구도의 그림이다. 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 세 폭이 있는데 나머지는 순천 송광사와 하동 쌍계사에 있다.

▲ 선암사 화엄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란 화엄경의 방대한 내용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담은 것이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더불어 18세기 후반의 불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이다.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丁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도 특이하여 보가 없는 무량 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건물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꽃창호 아래쪽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 토끼 두 마리와 파랑새를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 원통전 창호의 조각
 원통전 어칸은 화려한 꽃창으로 만들었는데 꽃창 아래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토끼 두 마리를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원통전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하여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에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숙종 때 호암대사가 선암사를 중창 불사할 때의 일이다. 호암대사가 중창 불사를 위해 대장군봉의 배바위8)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바위 밑으로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면서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한편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전에 걸려 있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이 보관하고 있다.

원통전의 뒤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원통전의 뒤켠 오른쪽으로는 응진전·달마전·진영당·미타전·산신각이 모여 있는 응진전 영역이 있다. 응진전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약간씩 밀려들어가면서 배열되어 있는데, 대문에서 볼 때는 가지런하게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진영당에는 아도화상을 비롯하여 도선국사, 대각국사, 호암대사 등 선암사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영역 옆은 선암사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한적하기 그지없는 무우전 영역이다. 무우전은 얼마전까지 태고총림9) 방장실로 쓰였다. 무우전은 ㄷ자형의 승방으로, 각황전을 둘러싸고 있다. 규모는 크지만 형태는 소박한 승방과, 비록 단촐하지만 화려하고 날렵한 각황전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각황전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 당시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철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밖에 경내에는 창파당과 천불전 등의 전각이 있는데 대웅전 영역 왼편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증설된 건물들이다. 창파당은 종무소와 강원으로 사용되는 ㅁ자형 건물로, 현대적 건축재료를 많이 쓰고 외벽을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눈에 띈다.

무량수전이라고도 불리는 천불전은 교육원으로 이용되며, 역시 ㅁ자형이다. 중앙에 마당을 두었으며, 전체가 중층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골격이 커서 웅장해 보이며 이국적인 느낌도 든다.

선암사의 요사채는 ㅁ자형 건물이 특히 많다. 설선당·심검당·창파당·천불전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모두 안마당 쪽에 넓은 대청을 갖고 있는 점이 민가와 비슷하고 위층은 수장 공간으로 이용하는 특징이 있다.

▲ 선암사 뒷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손꼽힌다. 丁자형으로 지어진 이 건물 안쪽에 앉아 용변을 보면 살창 너머 숲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대각암 가는 길의 해천당 옆에 자리잡은 뒷간이 그것이다. 입구에 ‘뒤’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읽어 ‘깐뒤’로 애교스럽게 불리곤 한다. 예로부터 가풍(家風)을 알려면 화장실과 부엌을 보라고 했는데,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의 이 뒷간이야말로 단아한 선암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바닥의 짜임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아랫부분에 살창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살창은 환기구 역할도 한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을 최근 새로 짓다시피 보수하였는데, 본래 ‘뒤’의 장점을 잘 살린 채로 보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히는 뒷간이다.

▲ 뒷간 현판
 뒷간 입구에는 오래된 표기법으로 쓴 ‘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사람들은 애교스럽게 ‘깐뒤’라 부른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仙巖寺선암사 伽藍가람 배치도 ③ ~
















       仙巖寺선암사 伽藍가람 배치도 ③ ~
































       창파당? ~
















































       천불전?.. 스님들이 손수 제초작업을 하신다 ~
































       겹벚나무 ~
















       삼성각? ~
































       ? ~
















       ? ~
















       ? ~
































       차밭 ~
















































       境內경내에 들어서니 아담한 돌담길이 이어진다.. 가람 이름은 배치도를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가람 배치도에 의하면.. 오른편엔 아마도 산신각, 달마전, 응진전, 미타전, 진영당이 왼편으론 각황전, 무우전이 있을 것이다 ~
































































       가람 배치도를 보면.. 원통전, 노전, 장경각이 있을 것이고... ~
















       무우전일까? ~
































       겹벚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는 정원이 나오고... ~
















































































       院正宗원정종.. 가람 배치도엔 나오지 않는다.. 무우전 앞 가람인 듯... ~
















































































       팔상전 ~
































































































       대웅전 뒷편 ~
















       팔상전 ~
















       불조전 앞에서 축대보수작업을 하시는 스님 ~
































       블조전 ~
















       과거 7佛과 미래 53佛 합하여 60佛의 佛像을 모심 ~
















































       대웅전 뒷 모습 ~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해            설      Ⅰ

[개관 정리]

▶ 성격 : 인식론적(철학적), 관념적, 상징적, 주지적

▶ 표현

  * 의미의 전개 과정이 논리적이면서도 점층적으로 심화 · 확대함.(그(너) → 나 → 우리)

* 소망을 나타내는 간절한 어조를 사용함.

* 사물(꽃)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배경으로 함.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이름을 불러줌.( 명명(命名)행위 ) → 대상의 인식 및 의미 부여, 대상과의 관계 형성

* 이름 → 다른 것과 구별하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 붙이는 것.

* 하나의 몸짓

  → 단순히 움직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인격도 의미도 없는 존재

      사물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즉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즉자적으로 놓여 있는 상태

* 꽃 → 의미있는 존재

* 빛깔과 향기 → 그에게 인식되기 전에 내가 지닌 나의 본질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존재론적 소망 (무엇 = 상호 간에 의미 있는 존재 )

       사물은 홀로 존재하므로 고독하다. 이 고독함이 존재의 허무를 부르고 연대의식을 낳고 초월이나 초인적 상황을 갈망하게 되는데, 시인은 인간의 고독이 이 같은 연대의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식의 확산이며, 존재의 보편적 삶의 질서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의지다. 김춘수 시인은 이후 이 시를 개작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는 무의미의 순수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의미'라는 용어 자체도 배제한 셈이다.

 

주제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 김춘수 시인의 "꽃"에 대해서

     ㉠ 조남현 - '생명의 극치와 절정(존재론적 고뇌와 불안에 떨 게 만드는 지순지미한 세계)

     ㉡ 이형기 - '단순한 사물이 아닌 필경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본질

     ㉢ 이승훈 - 시·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는 개념  

⇒ 한국 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이별의 한을 노래하거나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심미적인 대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춘수의 꽃은 '구체적 사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꽃'으로 처리되는 주지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이름을 불러주기 전(무의미한 존재)

▶ 2연 : 이름을 불러준 후   (의미있는 존재)

▶ 3연 : 의미화(인식)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 4연 :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의 소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화병에 꽃힌 꽃을 보고 시의 화두가 생각나서 쓴 것이라고 한다. 꽃의 색깔은 선명하지만, 그 색깔은 금세 지워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론적 위기를 충동질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사물'과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작품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깔고 있어서 정서적 공감과 더불어 지적인 이해가 또한 필요한 작품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늘려 있다.  이것들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전에는 정체불명의 대상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이 불리워짐으로써 이름을 불러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내가 의미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에, 시적 화자 역시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줄 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의 전개 과정은 아주 논리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개의 논리성은 우리 인식의 과정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명명'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2연에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논리적 흐름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가 전이된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맥락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 연작시 '꽃'

내가 꽃을 소재로 하여 50년대 연작시를 한동안 쓴 데 대해서는 R. M 릴케 류의 존재론적 경향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6 · 25 동란이 아직 그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나는 마산 중학(6년제)의 교사로 일을 보고 있었다. 교사(校舍)를 군(郡)에 내주고 판잣집인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사무를 보고 할 때이다. 방과 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뭣 때문에 그랬는지 그 판잣집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저만치 무슨 꽃일까, 꽃이 두어 송이 유리컵에 담겨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걸 나는 한참 동안 인상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분위기 속에서 꽃들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 빛깔이 눈송이처럼 희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하룬가 이틀 뒤에 나는 '꽃'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 시가 써졌다.




해            설      Ⅱ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춘수(金春洙)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상징시
갈래 : 내재율
어조 : 사물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려는 관념적, 철학적, 명상적, 갈망적 어조
심상 : 비유적, 상징적 심상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철학적, 인식론적
표현 : 그저 정체 불명의 대상에 지나지 않던 '그'는 호명에 의해 비로소 꽃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릴케 식의 시의 변용(變容) 곧 시적 변용이다. 시적 자아도 내가 이렇게 어느 대상을 인식해 간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인식의 대상이 되고 싶음을 토로한다.
특징 : 명명(命名) 행위에 의한 인식을 바탕으로 함.
표현 : 의미의 점층적 확대(단계적인 의미의 심화 과정을 보임) , 시적 변용
       ┌ 나→너→우리
       └ 몸짓→꽃→눈짓
구성 :
①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의 무의미한 존재(제1연) - 기
② 명명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옴(제2연) - 승 ( 나 - 주체 )
③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갈망(제3연) - 전 ( 나 - 객체, 대상 )
④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제4연) - 결( 우리 - 객체, 주체 )
제재 : 꽃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의 소망. 존재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탐구



  어휘와 구절

이름 : 허무로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 줄 수 있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
: 이름의 명명을 통해 존재성을 갖게 된 본질
빛깔과 향기(香氣) : 본질적인 요소
무엇 : 본질에 맞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존재를 지시
의미(意味) : '꽃', '사랑' 등 여러 번의 퇴고를 거친 시어로 존재의 본질을 뜻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에는 그는 나에게 무의미한 사물에 불과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자, 그 본질을 밝히는 행위가 된다.
하나의 몸짓 :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무의미한 사물을 뜻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존재를 깨닫고 그에게 의미를 부여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라는 형상물이 되어 나와 의미 있는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와 본질에 맞는 의미를 부여하였듯이
빛깔과 향기(香氣) : 사물의 본질을 의미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누군가에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의미 없는 존재, 즉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無)의 존재에서 본질에 따라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 눈짓이 되고 싶다. :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곧 사랑의 관계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상당히 까다로운 철학적, 관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란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그 이름 및 의미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1, 2연이 특히 이 점에서 중요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물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물들이 원래부터 어떤 이름과 의미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름이란 누군가가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고자 해서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임으로 해서 사물과 거기에 이름을 붙인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가 곧 그들 사이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사물은 이름이 없는 동시에 어떤 다른 존재(사람)에게 아직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생각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꽃이라는 사물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꼭 꽃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제1연이 말하듯이 꽃은 내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저 혼자 있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수많은 이름 없는 사물의 하나였을 따름이다. 그런 사물에 대해 내가 `꽃'이니 `장미'니 `코스모스'니 하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즉, 나와의 관계 속에서 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이는 일은 사물이 의미를 가지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면 제3, 4연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다. 그 내용은 내가 어떤 사물에게 꽃이라는 이름과 의미를 주었듯이 나에게도 누가 알맞는 이름과 의미를 달라는 것이다.

 제4연에서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름'이란 김 아무개, 이 아무개 하는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참된 모습과 가치를 이해하면서 서로에게 부여해 주는 `진정한 이름'이다.

 다시 말하여, 시인은 틀에 박힌 관습적 관계를 넘어서 사물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져야 할 진정한 관계, 진정한 사랑, 진정한 이름, 진정한 의미 등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것이다. 그 간절한 소망은 제3, 4연의 호소하는 듯한 어조에도 나타난다. [해설: 김흥규]



 참고 자료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에 대한 시론

 사생(寫生)이라고 하지만, 있는 실재(實在)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재와는 전혀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어들게 되고, 자유 연상이 개입 된다.

 논리와 자유 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간여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숴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詩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그에 의하면 의미는 산문에 보다 어울리지만 무의미는 시의 형식에만 알맞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무의미는 산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는 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의미의 시에 익숙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시관에 도전한 것이었다.

 또한 사물에 대한 일체의 판단이나 선입관을 중지하는 방식을 통하여 의미 해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의 60년대 시 '처용', '처용 단장', '샤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이런 대표적인 작품의 예이다.

 '꽃'에 나타난 작가의 존재론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는 시이다. 너와 나를 연인 관계에 놓인 사람으로 대치하여,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평범한 연애시의 범주에 안주하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이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진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의미 없는 것에서, 상호 인식을 통하여 의미 있는 것, 또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진리를 형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런 존재 인식의 수단을 언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파악한 것이다. 여기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일상어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어의 가장 정제된 형태로서의 시적 언어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아울러 이 말은 인간이 시 또는 시적 언어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작자 소개

김춘수 金春洙 1922.11.25 -  . 경남 충무시 동호동 출생. 경지중학을 졸업하고 니온대한 예술과 3학년 중퇴. 통영중학교.마산고등학교 교사.마산대학 교수.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 강사를 거쳐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

 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사화집 <날개>에 시'애가'를 발효하면서 시작을 시작했으며,대구지방에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외 1편을 발표.

 첫 시집 <구름과 장미>가 발행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이어 시 <산악>,<사>,<기(旗)>,<모나리자에게>를 발표,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주로 <문학예술>,<현대문학>,<사상계>,<현대시학> 등에서 창작활동과 평론활동을 전개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외에 <늪>,<기>,<인연(隣人),<제일시집>,<꽃의 소묘>,<부타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타령조 기타>,<처용>,<김춘수시선>,<남천(南天)>,<근역서제>,<비에 젖은 달>,<김춘수전집>,<처용이후>,<김춘수>등과 시론집으로는 <세계현대시감상>,<한국현대시형태론>,<시론> 등을 간행.

 그의 초기의 경향은 릴케의 영향을 받았으며,시가 아니고서는 표현할수 없는 사물의 정확성과 치밀설 , 진실성을 추구하였으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형행에서 벗어나,이른바 무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으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적인 성격의 문장을 시의 형식으로 도입하였는데 <현대시학>연재 장시 '처용단장'에서 부터는 설명적 요소를 거세해버린 이미지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경력 상의 특이점으로는 광주 항쟁이후 태동한 5공화국 독재 정권 하에서 자신의 지론인 순수시, 무의미 시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그 '순수시의 순수성'이 지닌 불순한 의도를 의심받게 되었다. 이는 미당 서정주의 전두환 찬양 연설과 함께 당시 젊은 문학 지망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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