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들에 둘려싸인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자기 生命에의 畏敬처럼 모든 생명의지들에게 동등한 생명에의 외경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체험하는데 倫理가 있는 것이다.
윤리란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히 확대된 책임이다 ~ - 슈바이처
★ 우주 온 세상의 모든 물질의 총량은 한정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함에 이제부터라도 내 삶에 필요한 만큼만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련다. 그 이상을 사용하거나 소유한다는 것은 貪慾이리라 ~
탐욕이란 곧 다른 生命體생명체의 필요량을 착취한다는 것임을 비로서 깨닫는다...
이제부터라도 바로 少慾知足하는 삶이리라 ~ 소욕지족.. 소욕지족하리라 ~ - 이름없는이
※ 본 <山水間我亦절로>방은 일반적 "사진방"이 아니라.. "사진으로 쓰는 山行記(& 散策記)방"입니다.. - 저절로
본존 석가모니불 & 협시 문수보살(左)·(右)보현보살 ~
본존 석가모니불 & 협시 문수보살(左)·(右)보현보살 ~
白羊寺 大雄殿 ~
※ 古佛叢林白羊寺
대한불교조계종에는 8개의 총림 즉 종합수행도량이 있다. 총림叢林은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현재 해인총림 해인사, 영축총림 통도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 금정총림 범어사, 팔공총림 동화사, 쌍계총림 쌍계사 등이 있다.
내장산과 백암산, 입암산이 들어선 전남북의 경계 부근은 노령산맥의 핵심지대이다. 백양사는 그중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앉은 해발 741m의 백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백암산 일대는 조선 팔경의 하나로 꼽혔는데, 1971년에 전북의 내장산과 묶여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각각 백양사 지구와 내장산 지구로 불린다.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은 걱실걱실한 갈참나무와 여릿여릿한 단풍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기분 좋은 흙길이다. 어느 곳보다 수량이 흡족한 계곡물을 왼편으로 끼고 절을 향해 들어가노라면 아담한 이층누각, 쌍계루가 저 앞에 모습을 보인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지만, 뒤편에 높이 치솟은 회백색 바위절벽과, 계곡에 둑을 막아 만든 못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더불은 쌍계루의 모습은 그대로 오려내어 그림엽서를 만들어도 될 만큼 아름답다.
쌍계루 양편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곡 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부도밭이 있고 왼편으로 휘어들면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송만암 선사가 한창 백양사를 중창하던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집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에 적힌 ‘대가람 백양사’라는 반듯한 해서체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좌우로 스님들 공부하는 방과 요사채, 그리고 고루와 종각이 늘어서 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 2층 문루인 우화루, 우화루를 지나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돌아가며 대웅전, 칠성각과 진영각, 극락보전, 명부전이 둘러서 있다. 극락보전을 빼고는 대부분 송만암 선사가 1917년부터 절을 중창하면서 하나하나 세운 건물들이다.
백제 무왕 33년(632), 이곳에 절을 연 여환(如幻)은 절 이름을 백암사라고 하였다. 그후 고려 덕종 3년(1034)에 중연(中延)선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여 대찰을 이루어 놓고 정토법문을 널리 펴기 위해 절 이름을 정토사라고 고쳤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는 당대의 명문 거족 출신이며 각진(覺眞)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각엄(覺儼)존자가 그간 퇴락한 정토사를 다시 일으키고 송본 대장경을 사들여 소장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벌였다.
조선 시대로 들어와서는 고성 이씨들의 원찰로, 또는 장성현의 자복사찰로 유지되다가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과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이 이 정토사에 주석하게 되면서 그들의 문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주지를 맡게 되었다. 설파와 연담은 서산(西山)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4대 법손으로서 영조 1년(1725)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던 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92)대사의 법손들이다.
이후 1917년부터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지금의 백양사를 이룬 만암(曼庵)선사(1875~1957)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는 설파와 연담의 문손들 가운데는 양악(羊岳)·백파(白坡)·한양(漢陽)·설두(雪竇)·금담(錦潭)·환응(幻應) 스님 들이 있다. 이 가운데 백파 스님은 고창 선운사에서 출가했지만 백양사 운문암에서 강석을 베풀어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고, 만년에 추사 김정희와 편지로 선에 관한 논쟁을 하며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인연으로 추사는 백파 스님의 비명을 짓고 썼으며 백파 스님 문손들의 법호도 미리 써 주었다고 한다. 위에 든 스님들의 법호 가운데 설두, 환응, 만암, 그밖에 다륜(茶輪), 석전(石顚) 등이 모두 추사가 미리 지어 놓은 것으로 후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정토사라는 절 이름이 언제 백양사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선조 때라거니 숙종 때라거니 하는 전설이 있지만, 헌종 때나 철종 때의 기록에도 여전히 백암산 정토사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지기로는 설파 스님의 법손인 환양 팔원(喚羊 八元)선사가 약사암에 있으면서 늘 불경을 외웠는데, 어느 날 뒷산 백학봉에서 흰 양 한 마리가 내려와서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다 듣고 돌아갔다. 그 뒤로 백암산 정토사를 백양산 백양사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팔원선사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백양사라는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은 고종 이후 만암선사가 절을 중흥시키면서의 일이다. 일제 때 31본산의 하나였던 백양사는 지금은 조계종 18교구의 본사로서 26개소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백양사 근처에서부터 절 뒤의 백학봉 서쪽 기슭까지는 사철 푸른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이곳은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내장사 부근의 단풍을 전국에서 제일가는 것으로 쳐서 봄에는 백양사요 가을에는 내장사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새파란 비자림으로 뒷받침된 백양사의 단풍도 만만치는 않아서, 양으로 보면 내장사이지만 질로 보면 백양사라는 사람도 있다.
백양사 뒤 계곡을 따라 3.5㎞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처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했고 진묵대사의 행적이 얽혀 있으며 백파선사가 머물기도 하는 등 내력으로 보아도 백양사에 딸린 여러 암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른 여러 암자와 함께 완전히 타서 없어졌다. 그후 1981년에 새로 암자 건물이 들어섰다. 운문암 뒤의 상왕봉에 오르면 백암산과 연이은 내장산의 연봉, 들쭉날쭉한 암봉의 장관, 그리고 멀리 무등산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白羊寺大雄殿은 1974년 9월 24일 전남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본존불상을 모신 법당인데, 1917년 송만암(宋曼庵) 대종사가 백양사를 5중창하면서 건립하였다. 건물 자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지만, 전통적인 건축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불전 안에는 본존인 석가모니불이 중앙에, 협시인 문수보살·보현보살이 좌우에 있다. 불단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불을 봉안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으로, 건축양식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2단의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 중앙으로 계단을 두었고,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간포 2조씩의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안쪽이 3출목, 바깥쪽이 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내진칸과 외진칸에는 높이를 달리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툇간에는 용모양의 퇴량을 걸쳤다. 지붕의 4모서리에는 원형의 활주가 세워져 있다. 창호는 전면은 모두 4분합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은 3칸 모두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후면의 어칸에도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주간포는 전면에 2구씩 배치되었고 양측면에는 중앙칸은 1구, 앞칸은 2구, 뒤칸은 2구를 놓을 자리에 1구만 배치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건립으로,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다포양식에서 후퇴한 면모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첨차살미의 최상단은 예리한 삼각형 모양에서 익공계 모양으로 변화하였으며, 쇠서도 매우 섬약해진 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사찰건물들의 거의 공통된 예이며, 전면의 기둥 간격이 모두 같은 것이 특징이다.
古佛梅 ~
청량원 ~
~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해 설 Ⅰ | ||||||||
[개관 정리] ▶ 성격 : 인식론적(철학적), 관념적, 상징적, 주지적 ▶ 표현 * 의미의 전개 과정이 논리적이면서도 점층적으로 심화 · 확대함.(그(너) → 나 → 우리) * 소망을 나타내는 간절한 어조를 사용함. * 사물(꽃)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배경으로 함.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이름을 불러줌.( 명명(命名)행위 ) → 대상의 인식 및 의미 부여, 대상과의 관계 형성 * 이름 → 다른 것과 구별하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 붙이는 것. * 하나의 몸짓 → 단순히 움직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인격도 의미도 없는 존재 사물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즉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즉자적으로 놓여 있는 상태 * 꽃 → 의미있는 존재 * 빛깔과 향기 → 그에게 인식되기 전에 내가 지닌 나의 본질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존재론적 소망 (무엇 = 상호 간에 의미 있는 존재 ) 사물은 홀로 존재하므로 고독하다. 이 고독함이 존재의 허무를 부르고 연대의식을 낳고 초월이나 초인적 상황을 갈망하게 되는데, 시인은 인간의 고독이 이 같은 연대의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식의 확산이며, 존재의 보편적 삶의 질서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의지다. 김춘수 시인은 이후 이 시를 개작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는 무의미의 순수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의미'라는 용어 자체도 배제한 셈이다.
▶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 김춘수 시인의 "꽃"에 대해서 ㉠ 조남현 - '생명의 극치와 절정(존재론적 고뇌와 불안에 떨 게 만드는 지순지미한 세계) ㉡ 이형기 - '단순한 사물이 아닌 필경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본질 ㉢ 이승훈 - 시·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는 개념 ⇒ 한국 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이별의 한을 노래하거나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심미적인 대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춘수의 꽃은 '구체적 사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꽃'으로 처리되는 주지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 ||||||||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이름을 불러주기 전(무의미한 존재) ▶ 2연 : 이름을 불러준 후 (의미있는 존재) ▶ 3연 : 의미화(인식)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 4연 :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의 소망 |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화병에 꽃힌 꽃을 보고 시의 화두가 생각나서 쓴 것이라고 한다. 꽃의 색깔은 선명하지만, 그 색깔은 금세 지워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론적 위기를 충동질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사물'과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작품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깔고 있어서 정서적 공감과 더불어 지적인 이해가 또한 필요한 작품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늘려 있다. 이것들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전에는 정체불명의 대상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이 불리워짐으로써 이름을 불러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내가 의미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에, 시적 화자 역시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줄 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의 전개 과정은 아주 논리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개의 논리성은 우리 인식의 과정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명명'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2연에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논리적 흐름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가 전이된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맥락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 연작시 '꽃' 내가 꽃을 소재로 하여 50년대 연작시를 한동안 쓴 데 대해서는 R. M 릴케 류의 존재론적 경향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6 · 25 동란이 아직 그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나는 마산 중학(6년제)의 교사로 일을 보고 있었다. 교사(校舍)를 군(郡)에 내주고 판잣집인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사무를 보고 할 때이다. 방과 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뭣 때문에 그랬는지 그 판잣집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저만치 무슨 꽃일까, 꽃이 두어 송이 유리컵에 담겨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걸 나는 한참 동안 인상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분위기 속에서 꽃들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 빛깔이 눈송이처럼 희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하룬가 이틀 뒤에 나는 '꽃'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 시가 써졌다. | ||||||||
해 설 Ⅱ | ||||||||
지은이 : 김춘수(金春洙)
이름 : 허무로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 줄 수 있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
이 작품은 상당히 까다로운 철학적, 관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란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그 이름 및 의미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1, 2연이 특히 이 점에서 중요하다.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에 대한 시론 사생(寫生)이라고 하지만, 있는 실재(實在)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재와는 전혀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어들게 되고, 자유 연상이 개입 된다.
김춘수 金春洙 1922.11.25 - . 경남 충무시 동호동 출생. 경지중학을 졸업하고 니온대한 예술과 3학년 중퇴. 통영중학교.마산고등학교 교사.마산대학 교수.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 강사를 거쳐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 |
★ 우주 온 생명체들은 모두 다 행복할지이다.. 평안할지이다.. 안락할지이다 ~
- 숫타니파타
☞ ★ [위성사진 대한민국 지도] 보기
'山水間我亦절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산책길 <15년 가을- ①> : 감서오명 만난 친구들.. ♪~ ♬~ (0) | 2015.12.25 |
---|---|
ⓞ 古佛叢林白羊寺 <151029> : 白羊寺 & 丹楓 ③/3 - ♪~ ♬~ (0) | 2015.12.24 |
ⓞ 古佛叢林白羊寺 <151029> : 白羊寺 & 丹楓 ①/3 ♪~ ♬~ (0) | 2015.12.22 |
@ 草木香따라.. 水風響따라.. <31-151028-20> : 中晩秋 無等山.. <원앙 암수컷 무리> ~♪.. ♬~ (0) | 2015.12.21 |
@ 草木香따라.. 水風響따라.. <31-151028-19> : 中晩秋 無等山.. <용추계곡> ~♪.. ♬~ (0) | 201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