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합(野合)으로 태어난 공자, 인류 스승이 되기까지
기원전 11세기, 고대 중국에 주(周)나라가 들어서던 때에 철기시대가 도래하고, 철기농기구와 소를 이용하면서 농업생산량이 증대돼 먹고사는데 여유가 생겼고, 이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궁리하는 인간중심의 인문학이 싹트게 됐다.
서양에선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녔던 것이나,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인간이 타고나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한다’면서 인문학의 도래를 알렸다면, 중국에서는 공자(孔子)가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인(仁)을 근간으로 하는 유가(儒家)학파를 세운게 중국 인문학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를 지나 진시황제(秦始皇帝) 때 책이 불태워지고, 유학자들이 땅에 묻혀 죽음을 당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탄압을 받은 이후, 한(漢)나라 때에 이르면 유가학파는 국가경영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유가학파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왕조시대 지배권력의 주요 이념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보니, 유가학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는 지극히 존중 받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지성(至聖)’으로서, 만세토록 영원한 선생님으로 드러나신 분이라는 뜻에서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일컬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에는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성인이란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칭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공자를 중국 최초의 ‘알바생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를 너무 비하하는게 아니냐고 여길지 모르겠다.
『논어』「자한(子罕)」편에서는 태재(太宰)가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성인이신가? 어찌 그리 재주가 많으신가?(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라고 물었다. 이에 자공이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하늘이 내신 성인이며, 또 재능도 많으신 분이십니다.(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라고 대답했다, 공자가 이 대화를 듣고는 “태재가 나를 아는가! 나는 어려서 빈천하였기 때문에 미천한 일을 잘 하는 것이다.(太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공자 스스로 자신이 어려서 빈천하였기 때문에 미천한 일을 잘한다고 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창고지기나 목동일 등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여러 직종에서 알바생활을 많이 하며 고되게 자랐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관중(管仲)이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상인이라면, 공자는 최초의 알바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스승이 된 공자는 어째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직종의 알바를 해야 했을까? 공자의 전기가 실려 있는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탄생에 대해 “공자의 아버지 흘은 안씨 집안 딸과 비정상적으로 결합하여 공자를 낳았다.(紇與顔氏女, 野合而生孔子.)”고 했다. 여기에서 공자가 부모님의 야합(野合) 즉, 정상적인 혼인을 통하지 않은 채 맺어진 부부관계를 통해 출생했다는데, 이것이 후대에 큰 논란거리가 됐다.
공자의 아버지는 당시 60대 후반의 나이였는데, 첫번째 부인으로부터 이미 딸 아홉을 낳았고, 둘째 부인에게는 맹피(孟皮)라는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아들이 신체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의 아버지는 평소에 번듯한 아들을 하나 얻기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안(顔)씨 집안 셋째 딸 안징재(顔徵在)를 맞아 겨우 얻은 이가 공자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 부모가 비정상적으로 만나서 공자를 낳았다며, “야합하여 낳았다.(野合而生)”라고 한 것이다.
사마천의 이 기록을 근거로 공자의 어머니 성씨인 안(顔)자가 ‘화장을 한 얼굴’의 뜻인 것으로 미루어, 당시 그의 집안이 무속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또 ‘야합(野合)’이 ‘들판에서 만났다’는 뜻인 만큼 당시 자연스럽게 어울려 노는 민속행사 때, 60세가 훨씬 넘은 공자의 아버지가 10대 후반의 어린 처자를 만나 혼인관계를 맺어 공자를 낳았다는 설도 있다.
공자가 태어날 당시 공자의 배다른 첫째 누나는 나이가 쉰 살 정도였고, 막내누나도 공자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공자의 아버지가 새로 나이 어린 여자를 맞아 번듯한 아들 하나 더 보겠다니 이를 반겼을리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공자의 아버지는 공자가 태어난지 3년만에 사망했고, 공자가 17살 때 어머니도 생을 마감했다. 이때 공자에게는 10명이나 되는 이복동기가 있었지만, 그들의 보살핌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실제로 공자가 태어난 것도 집이 아니라 곡부(曲阜) 부근 니산(尼山)의 동굴이었던 것만 보더라도 그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비정상적’인 출생에 어린시절을 어렵게 보내면서, 여러 비천한 일들을 많이 하다 보니 많은 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는게 공자의 설명이다.
이처럼 공자가 비정상적으로 태어나 비천한 일들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라는 뜻의 ‘만세사표(萬世師表)’로서 공자의 면모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끝임없는 노력을 통해 세상의 스승이 된 본보기를 보였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한층 더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의 유학자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중시한다면서 적자와 서자를 차별했던 것이나, ‘금수저’ ‘흙수저’를 운운하면서 특정한 신분을 떠받드는 일이 우리 사회에 여전한 현실을, 저세상에서 공자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씁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출처 ⓒ 중기이코노미]
야합(野合)
신문, 잡지 등에서 ‘야합(野合)’이란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좋지 않은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친다는 뜻이다. 국회, 정당 같은 정치판에서 ‘날치기’란 말과 함께 쓰인다. 지난해 국회에서 2011년도 예산안 통과 때도 그랬다. 야당은 여당을 비난했고 당정이 야합했다고 쏴붙였다. 그럼 ‘야합’이란 말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을까.
야합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에서 처음 나온다. ‘사기’는 ‘십팔사략’과 함께 지혜를 밝혀주는 중국의 역사서다. 한나라 시대(漢代) 사마천이 오랜 전설시대 때부터 한대 초기까지의 역사를 적은 것이다. 연대별로 사건을 기록하는 편년체(編 年體)가 아니고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한 기전체(紀傳體)로 돼있다. ‘야합(野合)’은 들 야(野)자에 합할 합(合)자가 결합된 단어로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졌다. 이 단어는 중국의 성인인 공자와 얽혀 있다.
‘사기’에 “숙량흘(叔梁紇)은 안씨(安氏) 딸과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野合而生)”고 돼있다. 숙량흘은 공자의 아버지이고 안씨는 어머니다. BC(기원전) 551년 공자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일흔이 다 된 노인이었다. 반면 어머니(안징재)는 파릇파릇한 이팔청춘(16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원조교제 수준을 넘어선 나이차이다. 역사가들은 이 두 사람의 결합을 무슨 글자로 써야할지 난감해했다. 더욱이 그 땐 예법상 공자 어머니는 정실(정식 부인)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 무렵 3번째 결혼은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 아버지 숙량흘은 본처와 후처가 있었다. 공자 어머니 안징재는 숙량흘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서출이 아니다. 숙량흘에겐 아들이 있었지만 발을 저는 지체장애인이라 집안종사를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숙량흘에겐 집안의 대를 이을 반듯한 아들이 필요했고 공자 어머니와 만나 공자를 낳았다. 공자 아버지는 많은 딸 (10명)들과 몸이 성치 못한 맏아들이 있었으나 튼실하고 영리한 자식을 얻기위 해 나이 70이 넘어 안징재란 16살의 소녀를 얻어 뜻을 이룬 것이다. 손녀딸 뻘의 새 아내를 얻은 공자 아버지는 귀족 중 가장 낮은 계급인 무사였다. 추읍(鄒邑)의 대부라는 하위관직을 맡고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좋지 않게 봤다. 도덕적인 문제를 들어 비판하는 논조로 ‘야합’이란 단어를 처음 만들어 썼다. 글자의 본뜻은 온당치 못하게 둘이 정을 통했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방으로 덮쳤다’거나 ‘강간했다’에 해당된다. 중국의 일부 고전학자들은 “공자는 사생아”란 말까지 한다. 남녀가 결혼해서 애(공자)를 낳긴 했으나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는 부부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야합은 ‘들판에서 통정하다’ ‘혼인할 나이를 넘겨 결혼한 부부관계’ ‘정식 부부사이가 아닌 남녀가 정을 통함’으로 해석된다. 그 시절 중국에선 여자 49세, 남자 64세가 넘어서 결혼하는 것을 야합(野合)이라 불렀다. 따라서 ‘야합’이란 말을 하거나 글을 쓸땐 이런 말의 뿌리를 잘 알고 해야 전하고자 하는 원래취지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잘못 쓰면 엉뚱한 얘기가 되고 오해까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