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草木香.水風響따라 千年佛心길 걷다<160414- ⑦> : 松廣寺 <ⅰ>
★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들에 둘려싸인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자기 生命에의 畏敬처럼 모든 생명의지들에게 동등한 생명에의 외경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체험하는데 倫理가 있는 것이다.
윤리란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히 확대된 책임이다 ~ - 슈바이처
★ 우주 온 세상의 모든 물질의 총량은 한정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함에 이제부터라도 내 삶에 필요한 만큼만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련다. 그 이상을 사용하거나 소유한다는 것은 貪慾이리라 ~
탐욕이란 곧 다른 生命體생명체의 필요량을 착취한다는 것임을 비로서 깨닫는다...
이제부터라도 바로 少慾知足하는 삶이리라 ~ 소욕지족.. 소욕지족하리라 ~ - 이름없는이
※ 본 <山水間我亦절로>방은 일반적 "사진방"이 아니라.. "사진으로 쓰는 山行記(& 散策記)방"입니다.. - 저절로
송광사 주변 개략도 ~
제비꽃 白花 ~
봄맞이 ~
제비꽃 白花 ~
금창초 ~
송광사 가람 배치도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884m)의 서쪽에는, 한국불교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불(佛)?법(法)?승(僧)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가 있다, 승(僧) 그 들은 부처님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서원 한 살아 숨쉬는 보배로 부처님과 함께 무(無)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와 승복은 속세를 버리고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다, 우뚝한 생각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음으로 정신은 항상 맑기만 하다 악을 버리고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여 인간자신의 본성에 충실해감으로 무명의 올 실을 풀어가고 있다.
마음에 평화를 이루는 1천6백50 정보의 방대한 사찰면적에는 5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수려한 산야와 대가람이 어우러진 조계산 송광사와 선암사 일대는 우리나라 명승5호로 지정되고 1979년 12월 26일 전라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송광사는 신라 말엽 혜린 선사가 송광산 길선사(吉禪寺)로 창건하고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정혜결사 운동을 펴기 위해 자리잡고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부르다 조선 초엽에 송광사로 개칭되었다.
산과 절이 이름을 바꿔 달은 이 절은 이미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을 지닌 대가람으로 유지되다가 조선 현종8년(1842) 큰불로 전소되고 1948년 여순 반란사건과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불타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1969년부터 시작된 제 8차 중창사업으로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서 아무리 넓은 경내를 돌아다녀도 비를 맞을 수 없다는 한국최대의 가람으로 있다.
고승열전의 승보사찰 송광사는 중창 후 8백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1158-1210) 이래로 진각(眞覺), 청진(淸眞), 명진(明眞), 회당(晦堂), 자정(慈精), 원감(圓鑑), 잠당, 묘명(妙明) 자원(慈圓), 자각(慈覺), 각엄(覺嚴), 정혜(淨慧), 홍진(弘眞), 고봉(高峰)의 16국사가 배출되었으며 근세에도 효봉대선사 ,구산스님, 지환, 일초, 법정, 일관, 활연, 등의 스님들이 법통을 이어가는 중세 이후 불교를 꽃피웠던 사찰로 지금도 승가대학과 국제선원이 있어 승보사찰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승려들의 수도도량으로 선종(禪宗)의 종찰로 남아있다.
선(禪)은 인간이 가지고 생각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최후에 존재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교는 신라이후 고려에 이르러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구분되었다가 다시 조계종으로 합쳐져 지금에 이른다, 고려 말 재물과 권세에 연연하며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불교본래의 목표를잃고 타락과 기복불교가 성행하였다, 보조스님은 새로운 원(願)을 세워 기복불교를 버리고 선과 교를 함께 수행하는 새로운 수행공동체 건설에 참여하기를 권하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전국방방곡곡에 돌리고 조계종을 중흥하는 본거지로 송광사를 삼았다, 그리하여 지공(指空), 나옹, 태고(太古) 등 고려 말 3대 선사에 의하여 선풍(禪風)을 지속시킨다.
송광사의 가람은 청량 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조계산의 계곡 물이 굽이치는 곳에 홍교를 쌓고 그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5백m쯤 가면 역대 고승과 공덕주의 부도군이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 뒤쪽 작은 건물이 척추각과 세월각으로 죽은 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척주각(滌珠閣구슬을씻는곳)은 남자 영가 관욕 소이고 세월각(洗月閣달을씻는곳)은 여자 영가 관욕소로 절에 들어오기 전 목욕을 하는 곳으로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재를 지내러 오는 혼백도 목욕 후 들어오게 함이다.
절 입구 계곡물 위로 능허교와 문루인 우화각이 있다 우화각(羽化閣)은 청량각과 같은 다리 위에 지어진 누각으로 양쪽으로 건물들이 있어 앞으로 삐죽 나온 우화각은 더욱 운치가 있어 보인다.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변 하다는 의미인 '우화'라는 이름은 이 누각을 지나면 세속의 때를 벗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우화루 상류 쪽에는 웅장한 2층 누각인 침계루(枕溪樓:시내를 베고있는 누각)가 있고 우화루 하류 쪽에는 육감정(六鑑亭:눈(眼)귀(耳)코(鼻)혀, 몸(身)생각(意)을 고요히 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 보는 정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임경당(臨鏡堂:거울 같은 물가에 있는 집)이 있다 이 두 채의 건물은 송광사에서 가장 운치 있는 건물이다 우화각을 지나면 여유공간이 없이 곧 바로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鐘鼓樓) 법왕문이 대웅전을 향해 일직선상에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겹처마지붕으로 된 십자형 건물로 108평의 넓이로 국내 최대규모의 유일한 양식 법당으로 삼세여래(과거 연등불,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와 사대보살(문수, 보현, 관음,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전면 양쪽에는 지장전과 승보전이 있다. 승보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산회상을 재현 하여 석가세존과 10대 제자, 16나한 그리고 1250명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법당인데, 송광사가 승보사찰임을 나타내는 건물이다.
대웅전 뒤에는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하고 있다, 대상은 수선(修禪)구역으로 대웅전 바로 뒤에 대웅전과 함께 가람에 중심 건물인 설법전과 수선사가 있다,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아우른다는 정혜문을 들어서면 선방인 수선사 다, 스님들의 신청에 의해 심사 후 들어 갈 수 잇는 이곳은 한번 들어가면 적어도 석 달은 있어야 나 올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보통 산지사찰에서는 기피하는 것으로 송광사만은 승보위주라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방인 상사당(미소실이 있는 방장의 처소), 하사당(보물 제 263호), 응진전, 국사전(국보 제 56호) 조사전 등이 있고 승보전 뒤로는 관음전, 응향각, 문수전, 효봉영각과 도성당 그리고 성보박물관이 왼쪽의 가람들이다 성보박물관에는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 고려고종어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 노비첩(奴婢帖과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572호), 경질(經帙, 보물 제134호),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 대반열반경(보물제90호),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삼현원찬(보물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보물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제207호) 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종각인 종고루를 건너서면 법성료와 가장 작은 1칸 규모의 약사전(보물 제 302호) 영산전 (보물 제 303호), 혜청당(공양소), 주지실인 길상헌, 객사와 요새채 등이 있고 지장전 뒤로 목우헌, 행해당, 차안당, 목욕소 등이 가람의 우측에 밀집되어 있다 한편 선열당에서 개울을 건너면 화엄전 구역이 별도로 있는데 화엄전(비로자나불좌상,관음, 세지입상)과. 불조전(법보화삼신불法報化三身佛)과 불조(佛祖53불)이 나란이 있다, 승보사찰이자 조계총림인 송광사는 선수행(禪修行) 도량으로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아 많은 건물들이 요사로 쓰이고 있고 이 요사와 선방에는 일반인의 접근을 금하고 있다.
또 송광사에는 삼대 명물이라 불리는 '비사리 구시'와 '쌍향수' 그리고 '능견난사'가 있다. 비사리 구시는 큰 고목을 길게 둘로 잘라 속을 파낸 것으로 여물통과 비슷하나 스님들의 밥을 담아 두던 것이라 한다. 한 번에 4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약간 과장된 듯 하다. 쌍향수는 곱향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거대한 두 개의 향나무로 송광사의 부속 암자인 천자암에 있는데, 나무 전체가 엿가락처럼 비비 꼬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자암은 . 송광사 입구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벌교 방향인 남쪽으로 더 내려가다 보면 길 왼쪽으로 천자암 이정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경사길 4km 정도를 더 올라가야 천자암이다. 마지막으로 능견난사는 송광사에 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공예 그릇으로 현재30여 점이 성보박물관에 있다.
조계산 산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 · 천자암(天子庵) · 감로암(甘露庵) · 부도암(浮屠庵) · 불일암(佛日庵) · 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조계종21교구본사로 56개의 말 사 와 수련원 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교육기관이 있다.
적막한 산사에 고요한 달빛만이 차디찬 눈 속에 잠겨든다, 새벽예불을 알리는 법고와 범종 소리에 이어 동음의 염불 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진다. - 여행정보 僧寶宗刹승보종찰 松廣寺송광사
松廣山
조선왕조 선교양종으로의 불교 통폐합 – 구산선문이 조계선종 표방
임진 정유의 왜란 – 선교 분별 버리고 서산대사 중심 조계일종 재통합
부휴선사 법손 계속 배출
일주문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
고향수(枯香樹)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
척주각과 세월각 – 재를 지내러 오는 죽은 이의 영가를 목욕시키는 곳
羽化閣 - 소동파 적벽부의 羽化而登仙 - 중종38년(1543), 정조21년(1797)
枕溪樓 - 시내를 베고 있는 누각
臨鏡堂 - 六鑑亭이란 현판 - 六根을 고요히 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보는 정자
천왕문-성보각-종고루-대웅전-승보전-지장전
* 3대 명물
1.비사리구시
2.능견난사 (能見難思) - 청동접시, 숙종(1674-1720)이 붙인 이름, 전남유형문화재 19호,
金나라 황제 章宗 (1188-1208), 처음 500점, 1828 50점, 현재 30점, 재질 동철, 지름 16.7cm
3.천자암의 쌍향수 - 천연기념물 88호 곱향나무, 높이 12.5m, 수령 약 800년
* 큰스님
1. 보조 지눌 (1158-1210) - 부도; 송광사 삼일암 왼쪽 높은 언덕 위, 여수 흥국사, 화순 만연사
2. 구산 수련 (1909-1983) 제8차중창불사 - 현호 주지, 건축-신영훈 불보살상 비롯 제 조각상 - 최완수
3. 풍암 세찰 (1688-1767) - 풍암 영각
* 법당
1. 대웅보전 - 삼세여래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사대보살 (문수, 보현, 관음, 지장)
2. 지장전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
3. 승보전 (석가모니불, 10대 제자, 16나한, 1250비구)
4. 국사전 (국보 56호, 16국사 影幀, 정조4년 1780)
5. 적광전 – 구산 수련스님의 탑전
6. 수선공간 – 상사당, 하사당, 응진전, 설법전, 수선사, 국사전, 진영당
* 암자
1. 천자암
2. 불일암
3. 인월암
4. 광원암
5. 감로암 – 국제선원
6. 부도암
* 문화재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2호 높이 13.9cm, 폭 7cm 도토리 모양
<국사전> 국보 제56호
<고려고종어제서> 국보 제43호 33x361cm
<노비첩> 보물 제572호 66x57cm
<경패> 보물 제175호
<경질> 보물 제134호
<금동요령> 보물 제176호
<대열반경> 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삼현원찬> 보물 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 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보물 제207호
<약사전> 보물 제302호
<영산전> 보물 제303호
화진당?.. 佛日庵에서 甘露庵, 浮圖庵 및 律院을 거쳐 松廣寺 경내로 들어오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
신평천 ~
낙하담 ~
신평천 ~
죽단화 ~
左 탐진당(종무소), 右 解憂所.. 송광사 찾은 여인의 뒤태가 곱다 ~
慈濟院자제원.. 종무소 ~
無無門무무문.. 曉峰影閣효봉영각(효봉 스님의 眞影을 모신 전각) 문 ~
뒤쪽에서 경내로 들어왔기에 一柱門 통해 앞에서 들어오려고 碑林 쪽으로 이동한다.
징검다리를 건너 경내 밖으로 나간다 ~
碑林비림.. 翠微大禪師취미대선사를 비롯한 20여기의 高僧 碑石들이 서있다 ~
碑林비림에서 본 一柱門일주문 ~
불일서점 & 一柱門 ~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절집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1)이라는 명예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佛)·법(法)·승(僧) 가운데 승,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되었으니 세세손손 절의 자긍심이 될 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은 이 절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2)로 바꾸고자 했지만 가까운 곳에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3)이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 수선사라는 이름은 ‘깨달음[悟]은 혜(慧)이고 닦음[修]은 정(定)이므로 정혜(定慧)를 아우르는 것이 선(禪)이 된다’는 뜻을 드러내며, 정혜결사 의지를 담고 있다. 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한 희종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면 수선사라는 절 이름은 송광사로 바뀐다. 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처럼 송광사는 사격(寺格)이나 규모 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송광사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悠揚不迫)하게 짜놓은 동부(洞府),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長者)집 호정(戶庭)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 <답사여행 길잡이 11>
삼나무 & 一柱門일주문.. 曹溪山조계산 大乘禪宗대승선종 松廣寺송광사 ~
징검다리 연등 & 臨鏡堂임경당(요사채) ~
臨鏡堂임경당(요사채) 뒷편 ~
삼나무 ~
우화각 ~
洗月閣세월각 & 滌珠堂척주당 ~
枕溪樓침계루.. 사자루 ~
三淸橋삼청교에 세워진 羽化閣우화각 ~
신평천 연등 ~
침계류 앞 신평천 ~
天王門천왕문 ~
南方남방 增長天王증장천왕 & 西方서방 廣目天王광목천왕 ~
※ 南方 增長天王..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다. 수명장수를 기원하고 부귀영화를 바라는 이들이 마음으로 모시는 수호신장. 增長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재산증식을 도와준다 한다.
※ 西方 廣目天王.. 학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다.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살펴주는 수호신장. 소오강사 서방천왕은 왼쪽 허리춤에 새끼호랑이를 안고있는 특이한 경우이며, 오래 전부터 아이를 원하는 이들에게 남몰래 사랑을 받아왔다 한다.
北方북방 多聞天王다문천왕(左) & 東方동방 持國天王지국천왕(右) ~
※ 北方 多聞天王.. 예술을 상징하는 비파를 들고 있다. 문화 · 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는 수호신장. 비파에 새겨진 글들이 보물로 지정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다.
※ 東方 持國天王.. 권력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하게끔 도와주는 수호신장. 정관계,법조계,의료계 종사자들의 원만한 소원성취를 이루어 준다 한다.
聖寶閣성보각.. 박물관 ~
서양수수꽃다리 ~
鐘鼓樓종고루.. 법고는 땅위에 사는 네발 짐승, 범종은 땅속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 목어는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 운판은 창공을 나는 날개달린 짐승들을 위해 각각 울린다고 한다 ~
大雄寶殿대웅보전.. 대웅전 ~
~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해 설 Ⅰ | ||||||||
[개관 정리] ▶ 성격 : 인식론적(철학적), 관념적, 상징적, 주지적 ▶ 표현 * 의미의 전개 과정이 논리적이면서도 점층적으로 심화 · 확대함.(그(너) → 나 → 우리) * 소망을 나타내는 간절한 어조를 사용함. * 사물(꽃)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배경으로 함.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이름을 불러줌.( 명명(命名)행위 ) → 대상의 인식 및 의미 부여, 대상과의 관계 형성 * 이름 → 다른 것과 구별하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 붙이는 것. * 하나의 몸짓 → 단순히 움직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인격도 의미도 없는 존재 사물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즉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즉자적으로 놓여 있는 상태 * 꽃 → 의미있는 존재 * 빛깔과 향기 → 그에게 인식되기 전에 내가 지닌 나의 본질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존재론적 소망 (무엇 = 상호 간에 의미 있는 존재 ) 사물은 홀로 존재하므로 고독하다. 이 고독함이 존재의 허무를 부르고 연대의식을 낳고 초월이나 초인적 상황을 갈망하게 되는데, 시인은 인간의 고독이 이 같은 연대의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식의 확산이며, 존재의 보편적 삶의 질서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의지다. 김춘수 시인은 이후 이 시를 개작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는 무의미의 순수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의미'라는 용어 자체도 배제한 셈이다.
▶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 김춘수 시인의 "꽃"에 대해서 ㉠ 조남현 - '생명의 극치와 절정(존재론적 고뇌와 불안에 떨 게 만드는 지순지미한 세계) ㉡ 이형기 - '단순한 사물이 아닌 필경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본질 ㉢ 이승훈 - 시·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는 개념 ⇒ 한국 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이별의 한을 노래하거나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심미적인 대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춘수의 꽃은 '구체적 사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꽃'으로 처리되는 주지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 ||||||||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이름을 불러주기 전(무의미한 존재) ▶ 2연 : 이름을 불러준 후 (의미있는 존재) ▶ 3연 : 의미화(인식)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 4연 :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의 소망 |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화병에 꽃힌 꽃을 보고 시의 화두가 생각나서 쓴 것이라고 한다. 꽃의 색깔은 선명하지만, 그 색깔은 금세 지워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론적 위기를 충동질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사물'과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작품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깔고 있어서 정서적 공감과 더불어 지적인 이해가 또한 필요한 작품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늘려 있다. 이것들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전에는 정체불명의 대상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이 불리워짐으로써 이름을 불러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내가 의미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에, 시적 화자 역시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줄 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의 전개 과정은 아주 논리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개의 논리성은 우리 인식의 과정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명명'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2연에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논리적 흐름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가 전이된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맥락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 연작시 '꽃' 내가 꽃을 소재로 하여 50년대 연작시를 한동안 쓴 데 대해서는 R. M 릴케 류의 존재론적 경향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6 · 25 동란이 아직 그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나는 마산 중학(6년제)의 교사로 일을 보고 있었다. 교사(校舍)를 군(郡)에 내주고 판잣집인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사무를 보고 할 때이다. 방과 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뭣 때문에 그랬는지 그 판잣집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저만치 무슨 꽃일까, 꽃이 두어 송이 유리컵에 담겨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걸 나는 한참 동안 인상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분위기 속에서 꽃들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 빛깔이 눈송이처럼 희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하룬가 이틀 뒤에 나는 '꽃'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 시가 써졌다. | ||||||||
해 설 Ⅱ | ||||||||
지은이 : 김춘수(金春洙)
이름 : 허무로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 줄 수 있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
이 작품은 상당히 까다로운 철학적, 관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란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그 이름 및 의미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1, 2연이 특히 이 점에서 중요하다.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에 대한 시론 사생(寫生)이라고 하지만, 있는 실재(實在)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재와는 전혀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어들게 되고, 자유 연상이 개입 된다.
김춘수 金春洙 1922.11.25 - . 경남 충무시 동호동 출생. 경지중학을 졸업하고 니온대한 예술과 3학년 중퇴. 통영중학교.마산고등학교 교사.마산대학 교수.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 강사를 거쳐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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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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